
한국은행이 지난해 12월 발간한 ‘가계부채 디레버리징 추진 경과 및 향후 과제’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계부채 비율은 2021년 3분기 99.2%로 정점을 찍은 뒤 2025년 2분기 89.7%까지 낮아졌다. 한은은 지난 4년간의 조정을 두고 우리 경제와 금융시스템에 큰 충격을 주지 않으면서 진행된 첫 번째 의미 있는 디레버리징으로 평가했다. 금리 상승과 가계대출 규제 강화, 주택경기 둔화로 대출 증가세가 꺾인 데다 최근에는 경제성장이 더해지며 비율 하락을 뒷받침했다는 분석이다.
그렇다고 안심하긴 이르다. 한은은 통계 기준 개편 영향을 제외하면 가계부채 비율 하락 폭이 9.5%포인트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7.6%포인트 수준이라고 봤다. 게다가 현재 비율은 여전히 경제성장 제약 임계치로 거론되는 80~85%를 웃돈다. 정책 대응 없이 과거와 같은 가계부채 증가세가 이어졌다면 지금 비율이 110%에 가까웠을 것이라는 추정도 내놨다. 디레버리징이 일정 부분 성과를 낸 것은 맞지만, 위험 자체가 해소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더 눈여겨볼 대목은 전체 지표와 차주 체감 사이의 온도 차다.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 금융자산 대비 금융부채 비율처럼 경제 전체를 기준으로 한 지표들은 2021년 3분기 이후 뚜렷한 하락 흐름을 보였다. 반면 실제 부채를 보유한 가계를 기준으로 보면 소득 대비 대출 비율(LTI)과 총자산 대비 총부채 비율(DTA)은 2021년 3분기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나라 전체로 보면 빚의 무게가 줄어든 듯하지만, 정작 빚을 안고 사는 개인이 느끼는 부담은 여전히 크다는 의미다.
가장 먼저 드러나는 취약 고리는 청년층이다. 한은 분석에 따르면 2025년 3분기 기준 20·30대의 LTI는 246.9%로 40·50대 234.3%, 60·70대 237.4%보다 높았다. 소득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청년층이 다른 연령대보다 더 무거운 부채 부담을 안고 있다는 뜻이다. 보고서는 상당수 청년 차주의 높은 채무부담이 앞으로 소비 여력을 제약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한은이 청년층을 더 주목하는 이유는 앞으로의 부채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지난 10여 년 동안 30대 이하의 평균 금융부채는 빠르게 늘어 이미 40대와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이들이 생애주기상 차입 수요가 본격적으로 커지는 40~50대 구간으로 들어서면 부채가 더 불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게 한은 판단이다. 특히 청년층은 금리 인하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계층으로 분석됐다. 금리가 떨어질수록 다른 연령대보다 대출을 더 크게 늘리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설명이다.
부동산 시장에서도 이런 흐름은 이미 감지된다. 서울 아파트 매매거래에서 30대 이하 비중은 지난해 4월 33.2%에서 10월 39.5%로 높아졌고, 전국 기준으로도 같은 기간 29.3%에서 33.2%로 올랐다. 서울을 중심으로 집값 상승 기대가 확산하는 상황에서 청년층이 주택 구입을 위해 차입을 더 늘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여기에 주식시장 강세까지 겹쳤다. 2025년 1~10월 주요 증권사의 신규 주식계좌 가운데 30대 이하 비중은 50.9%로 가장 높았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신용융자와 신용대출을 활용한 투자 레버리지도 빠르게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고령층은 청년층과는 다른 방식으로 위험하다. 원래 생애주기상 은퇴 이후에는 축적한 금융자산과 노후소득을 바탕으로 빚을 줄여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한국의 고령층은 그렇지 못하다고 한은은 진단했다. 은퇴 전후 연령대의 부채 보유 가구를 보면 은퇴 이후에도 부동산담보대출을 중심으로 부채가 상당 기간 유지된다. 반면 소득은 줄어들기 때문에 평균 LTI는 60세를 기점으로 가파르게 상승하는 흐름을 보였다.
이 배경에는 자산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 60세 이상 금융부채 보유 가구의 실물자산 비중은 2025년 기준 85.2%로 높고, 금융자산 대비 금융부채 비율도 64.1%에 달한다. 자산 대부분이 부동산에 묶여 있어 현금흐름으로 빚을 줄이기 쉽지 않은 구조라는 의미다. 실제로 60대 이상 주택담보대출 차주 가운데 다주택자 비중은 잔액 기준 14.5%로 30대 이하 2.0%, 40·50대 8.2%보다 높았다. 한은은 주택 소유 선호와 가격 상승 기대, 부동산임대업 창업 등이 겹치면서 고령층의 부채 조정이 늦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노후소득 기반이 약한 점도 부담을 키우는 요인으로 지목됐다. 한국의 60세 이상 가구에서 공적연금·사회보장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20.9%에 그쳤다. 반면 사업·근로소득 비중은 61.0%로 높았다. 안정적인 연금보다 일과 사업에 더 의존하는 구조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생계유지와 부채 상환을 위해 고령층의 자영업 창업이 늘고, 자영업자 부채 역시 함께 불어나는 흐름이 나타난다고 한은은 봤다. 앞서 고령 자영업자 대출 문제와 가계부채 이슈가 사실상 한 줄로 이어져 있다는 얘기다.
차주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도 이번 보고서의 중요한 지점이다. 한은은 금융권 역시 구조적으로 주택담보대출을 선호할 유인이 크다고 짚었다. 국내은행의 영업이익 대비 이자수익 비중은 77.8%로 매우 높다. 가계대출은 기업대출과 이자수익률이 비슷한데 손실률은 더 낮아, 위험 대비 수익성 면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이다. 특히 금리 인하기에는 수신금리가 주택담보대출 금리보다 더 큰 폭으로 떨어지면서 신규 주담대의 예대금리차가 확대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금리가 내려갈수록 은행이 주담대를 더 늘리고 싶어지는 구조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규제 체계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2025년 3분기 말 기준 은행 자본규제상 가계대출 위험가중치는 19.9%로 기업대출 50.7%보다 크게 낮았다. 담보가 있는 주택담보대출의 손실위험이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기 때문이다. 한은은 금융여건이 완화되는 국면에서 수요뿐 아니라 공급 측면에서도 주택담보대출 확대 유인이 커지고, 그 결과 경제 전체적으로 금융불균형과 부동산 신용집중이 더 심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책에 대해서는 성과와 한계를 함께 짚었다. 한은은 그동안 단계적 DSR 도입과 총량 관리, 부동산 규제, 고정금리·분할상환 확대 등이 디레버리징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정책이 자주 바뀌면 시장의 예측 가능성이 낮아지고 정책 신뢰도 약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주택시장 기대심리가 높은 상황에서는 풍선효과가 나타나 정책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는 경고도 덧붙였다.
결국 한은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가계부채 비율은 정점에서 내려왔지만 상당 기간 80~85% 임계치를 웃도는 수준에서 움직일 가능성이 크고, 상황에 따라선 다시 정체하거나 상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청년층은 더 빌릴 가능성이 크고, 고령층은 빚을 충분히 줄이지 못하고 있으며, 은행은 여전히 주택담보대출을 선호한다. 겉으로 보이는 숫자는 진정됐지만 안쪽의 구조는 아직 팽팽하다. 한국 가계부채의 부담이 끝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금융안정보고서는 다시 확인하고 있다.
김봉수 기자 news@seconomy.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