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보조금 받고 또 밀가루 담합···무너진 시장 신뢰

기사입력:2026-05-22 18:06:33
사진=CJ제일제당
사진=CJ제일제당
[공유경제신문 김봉수 기자] 밀가루는 라면과 국수, 빵과 과자의 원료다. 국민 식탁에 매일 오르는 먹거리의 핵심 원료 가격이 6년 가까이 담합으로 결정됐다는 공정거래위원회 조사 결과는 한 업종의 일탈을 넘어 생활물가 관리 체계의 허점을 드러냈다.

공정위는 지난 20일 대한제분, 씨제이제일제당, 사조동아원, 삼양사, 대선제분, 삼화제분, 한탑 등 7개 제분사가 2019년 11월부터 2025년 10월까지 밀가루 공급가격과 물량을 담합했다고 밝혔다. 제재 수위는 과징금 6710억4500만원이다. 담합 사건 사상 최대 규모다. 7개사와 임직원 14명은 검찰에도 고발됐다.

문제의 본질은 과징금 액수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 업체는 2006년에도 밀가루 담합으로 제재를 받았다. 한 차례 처벌을 받고도 같은 시장에서 다시 가격과 물량을 맞췄다. 담합이 단순한 판단 착오가 아니라 업계에 굳어진 관행처럼 되풀이됐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수법도 노골적이었다. 대표자급과 실무자급 회합은 55차례 열렸다. 농심, 팔도, 풀무원 등 대형 수요처에 대한 가격과 물량이 논의됐다. 중소형 수요처와 대리점까지 대상이 넓어졌다. 원맥 가격이 오를 때는 인상 폭과 시기를 맞췄다. 원맥 가격이 내릴 때는 인하 폭을 줄이고 시기를 늦췄다.

더 무거운 대목은 정부 보조금이다. 정부는 물가 안정을 위해 제분사에 471억원을 지원했다. 국민 세금으로 마련한 돈이다. 그런데 공정위 조사대로라면 업체들은 보조금을 받으면서도 담합을 멈추지 않았다. 물가 안정을 명분으로 공적 지원을 받고, 시장에서는 경쟁을 피한 셈이다.

피해는 결국 소비자에게 돌아간다. 밀가루는 기업 간 거래 품목이지만 최종 가격은 라면, 빵, 과자, 외식 물가로 이어진다. 공정위 조사 결과 2022년 9월 제분사별 밀가루 판매가격은 담합 시작 시점인 2019년 12월보다 최소 38%에서 최대 74% 올랐다. 원가 상승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과점 구조도 문제를 키웠다. 2024년 매출액 기준 이들 7개사의 국내 밀가루 B2B 시장 점유율은 87.7%다. 상위 3개사만 해도 62.0%를 차지한다. 이런 시장에서 가격 신호가 경쟁이 아니라 회합으로 결정되면 수요처는 대응하기 어렵다. 소비자는 선택권 없이 오른 가격을 떠안는다.

공정위는 독자적 가격재결정 명령과 가격 변경내역 보고명령도 내렸다. 필요한 조치다. 다만 사후 제재만으로 반복 담합을 끊기는 어렵다. 가격 조정 과정의 투명성, 대형 수요처의 견제 장치, 임직원 내부통제, 담합 가담자에 대한 실질적 책임 추궁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기업도 이번 사건을 단순한 비용 문제로 봐서는 안 된다. 과징금은 회계상 비용으로 처리할 수 있다. 과징금은 돈으로 낼 수 있지만, 무너진 신뢰는 돈으로 되돌릴 수 없다. 국민 생활과 맞닿은 원료 시장에서 경쟁을 포기한 기업은 소비자의 신뢰를 말할 자격이 없다.

정부도 되짚어봐야 한다. 보조금은 시장 안정을 위한 수단이지 담합의 방패가 아니다. 물가 안정 사업을 설계할 때 지원금 지급 요건만 볼 일이 아니다. 사후 가격 검증과 경쟁 제한 행위 점검을 촘촘히 붙여야 한다. 세금이 독과점 사업자의 이익 보전 수단처럼 쓰였다는 의심이 생기는 순간 정책 신뢰도 무너진다.

밀가루 담합 사건은 생활물가 뒤에서 보이지 않는 시장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줬다. 이번 제재가 역대 최대 과징금이라는 기록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반복된 담합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못하게 만드는 제도와 감시가 뒤따라야 국민 식탁의 가격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김봉수 기자 news@seconom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