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국고보조금 디지털화, 관건은 신뢰

기사입력:2026-03-19 18:15:07
사진=CBDC
사진=CBDC
[공유경제신문 안혜린 기자] 정부와 한국은행이 국고보조금 지급 체계에 디지털화폐를 접목하는 시범사업에 나섰다. 전기차 충전시설 보조사업에 예금토큰을 적용해 자금 흐름을 보다 정교하게 관리하고, 부정수급을 줄이며, 정산 효율을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재정집행의 투명성을 높이려는 취지는 분명하다. 보조금 집행 체계를 디지털 기반으로 전환하겠다는 시도 역시 시대 흐름과 맞닿아 있다.

정책 당국이 기대하는 효과도 뚜렷하다. 보조금이 어디에 쓰였는지 확인이 쉬워지고, 지급부터 사용, 정산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하나의 체계 안에서 관리되면 행정비용을 줄일 수 있다. 목적 외 사용을 막는 통제력도 높아질 수 있다. 재정 운용의 효율성과 책임성을 함께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디지털화폐의 공공부문 활용은 충분히 검토할 만한 과제다.

다만 공공정책은 기술적 가능성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국고보조금은 단순한 결제 수단이 아니라 국민의 생활과 맞닿은 공적 자금이다. 이 때문에 디지털화폐가 가진 추적 가능성과 통제 기능은 장점인 동시에 신중히 다뤄야 할 요소이기도 하다. 정책 목적 외 사용을 줄인다는 명분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수급자의 선택권이 과도하게 제약되거나, 행정이 설정한 기준이 현실의 복합적 수요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면 제도는 효율을 얻는 대신 불편을 키울 수 있다.

특히 데이터 관리 기준은 분명해야 한다. 디지털 기반 지급 체계는 자금 흐름을 세밀하게 기록할 수 있다. 이는 재정의 투명성을 높이는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반면 거래 정보가 대규모로 축적되는 만큼 어느 기관이 어디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지, 보관 기간은 얼마나 되는지, 정책 집행 외 목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은 없는지에 대한 기준도 선명해야 한다. 제도 설계가 촘촘하지 않으면 투명성 강화라는 취지가 자칫 감시 논란으로 번질 수 있다.

디지털 접근성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스마트폰 앱 설치와 본인 인증, 전자결제 절차에 익숙한 이용자에게는 새로운 방식이 크게 낯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고령층이나 디지털 취약계층에게는 또 다른 문턱이 될 수 있다. 보조금은 필요한 이들이 제때 접근할 수 있어야 하는 공적 자금이다. 지급 방식이 고도화될수록 오히려 접근 문턱이 높아진다면 정책은 본래 취지를 스스로 훼손하게 된다. 실물카드나 오프라인 창구, 대면 안내 같은 보완 장치가 함께 마련돼야 하는 이유다.

시범사업인 만큼 지금은 성과를 서둘러 부각할 때가 아니라 한계를 차분히 점검할 때다. 정산 기간이 얼마나 줄었는지, 부정수급 차단 효과가 어느 정도였는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수급자의 체감 불편은 없었는지, 시스템 장애나 현장 혼선은 없었는지, 가맹점 인프라는 충분했는지, 개인정보 보호 장치는 실효적으로 작동했는지까지 함께 살펴봐야 한다.

국고보조금의 디지털화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일 수 있다. 그러나 공공의 영역에서 혁신은 속도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기술이 정교할수록 제도는 더 신중해야 하고, 통제력이 커질수록 권한은 더 절제돼야 한다. 이번 시범사업이 재정혁신의 출발점이 되려면 정부가 먼저 보여줘야 할 것은 기술의 우수성이 아니다. 국민이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제도적 신뢰다.

안혜린 기자 rin796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