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개장 직후 1501.0원을 기록했다. 정규장 기준 1500원선 돌파는 2009년 3월 이후 처음이다. 이날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3.8원 오른 1497.5원에 거래를 마쳤다. 종가 기준으로는 2008년 11월 25일 1502.3원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달 들어 야간 연장거래에서 1500원선을 웃돈 적은 있었지만 거래가 짧은 야간장과 정규장 돌파가 주는 의미는 다르다는 게 시장 평가다.
환율 상승의 배경에는 국내 수급보다 대외 변수가 놓여 있다. 미국·이란 전쟁에 따른 지정학적 긴장 고조, 국제유가 급등, 달러 강세가 한꺼번에 겹치면서 원화 약세 압력이 커졌다. 외국인 자금 이탈도 환율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 이날 유가증권시장에서 외국인은 8475억원을 순매도했다.
외환시장 참가자들은 이번 환율 급등을 원화만의 문제로 보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주요 통화 전반이 달러 대비 약세를 보이는 상황에서 한국 외환당국이 단독 개입만으로 추세를 되돌리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이다. 이에 따라 시장의 관심은 단순 개입보다 한일 공동 대응, 주요국 공조 같은 고강도 대응책으로 옮겨가고 있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14일 한일 재무장관 회의 뒤 “달러가 강세이고 유로화나 엔화·원화가 절하되고 있다”며 “중동 상황 안정이 중요하지만 필요하면 구두 개입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시장은 이를 한일 양국의 공조 가능성을 열어둔 발언으로 해석했다. 다만 구두 개입은 상징적 대응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구조적 불안 요인이 해소되지 않는 한 환율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1500원대가 ‘뉴노멀’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빠르게 번지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해 이후 이날까지 총 196거래일 동안 종가 기준 1400원선을 웃돌았다. 올해 들어서는 단 하루도 1400원 아래로 내려가지 못했다. 1400원대가 사실상 상시화한 만큼 1500원대 역시 유사한 경로를 밟을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환율 상단에 대한 눈높이도 높아지는 흐름이다. 연초만 해도 1500원 돌파 전망은 과도하다는 평가가 적지 않았지만 실제로 정규장에서 해당 수준이 열리면서 이제는 1600원대 중반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다만 상단이 가파르게 추가 상승할 것으로 단정하는 시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영화 부산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수출 기업의 달러 매도 물량이 남아 있어 하방 가능성도 함께 열어둘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정부·여당이 추진 중인 이른바 ‘환율안정 3법’의 실효성도 시장의 관심사다. 해외 주식에서 국내 주식으로 자금을 유도하는 국내시장 복귀계좌 도입, 개인 환헤지 투자에 대한 세 부담 완화, 기업의 해외 자회사 배당금에 대한 익금불산입률 상향 등이 핵심이다. 시장에서는 이 조치들이 환율 변동성을 일부 완화할 수는 있어도 달러 강세와 고유가, 지정학 리스크라는 본질적 변수에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있다.
박정수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환율안정 3법이 일정 부분 보완책이 될 수는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국제유가와 국제 정세라고 진단했다. 정부의 확장 재정 역시 환율 안정에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고환율이 단순한 외환시장 현상을 넘어 물가와 성장, 자본시장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변수라는 의미다.
한국은행은 시장의 경계심은 인정하면서도 과도한 불안을 경계했다. 이수형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은 17일 서울 중구 한은 본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원·달러 환율 급등과 관련해 “지금 단계에서 아주 걱정할 단계는 아니라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미국·이란 전쟁이라는 특수 요인을 제외하면 경상수지 흑자로 달러 수급이 견조하고 거주자 해외 투자도 최근 안정세를 보인다는 설명이다.
이 위원은 원화가 다른 주요국 통화보다 더 크게 흔들린다는 지적에 대해 원화 변동성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만의 요인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대만 달러에 대한 환헤지 수단으로 원화가 활용되는 점도 환율과 경제 펀더멘털 간 괴리를 키우는 요인으로 언급했다. 그는 아직 환율이 펀더멘털과 완전히 괴리된 수준인지 판단하기는 이르다고 했다.
한은은 중동 전쟁이 물가와 성장에 미칠 부담도 함께 짚었다. 이 위원은 최근 유가가 지난달 경제전망 당시 전제한 브렌트유 배럴당 64달러를 크게 웃돌고 있다며 물가 상방 요인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원자재 가격 상승은 비용 부담을 키워 성장률에는 하방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진단이다. 그는 현재 상황이 2월 전망 당시보다 물가 상방과 성장 하방 리스크를 모두 키운 상태라고 평가했다.
결국 향후 환율 흐름은 대외 충격의 지속 기간과 정책 대응 강도에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 중동 전쟁 장기화와 고유가, 달러 강세가 이어질 경우 1500원선 안착 가능성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주요국 공조와 외환당국의 신뢰도 높은 대응이 뒷받침된다면 상승 속도는 완화할 여지가 있다.
외환시장은 이미 1400원대를 새로운 기준선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이제 관심은 1500원대가 일시적 돌파에 그칠지, 구조적 레벨로 자리 잡을지에 쏠린다. 당국으로서는 단기 진화책을 넘어 시장이 납득할 만한 대응 원칙과 공조 시그널을 제시해야 할 시점이다. 한 외환시장 관계자는 “정규장에서 1500원선이 열린 이상 시장은 이제 1500원 안착 여부와 당국 대응 강도를 함께 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봉수 기자 news@seconomy.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