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지난 3일 공동성명에서 AI, 양자, 반도체를 공동 개발 잠재력이 높은 혁신 분야로 규정하고 미래를 위한 새로운 파트너십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양국은 현지 생태계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기업 간 협력을 촉진하며, 연구와 훈련의 시너지를 키우는 방향으로 전략적 협력을 심화하기로 했다. 한-프 관계 격상의 중심에 첨단기술이 자리 잡았다는 뜻이다. 외교 수사에 머물지 않고 기술동맹의 틀까지 겨냥한 합의로 읽힌다.
같은 날 서울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 열린 제9차 한-불 과학기술공동위원회는 이 구상을 한층 구체화했다. 한-프 수교 140주년과 프랑스 대통령 방한을 계기로 열린 이번 회의에서 양국은 AI와 양자 등 핵심 전략기술 분야에서 서로를 핵심 파트너로 재확인했다.
기초과학연구원, 한국과학기술원, 서울대, 고려대 등 한국의 주요 연구기관이 프랑스 최대 국립 연구기관인 국립과학연구센터(CNRS)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점도 눈길을 끌었다. 대학과 연구소 차원의 교류를 넘어 공동연구와 인력 교류의 폭을 넓히겠다는 신호다.
AI 분야에선 기술 경쟁만큼 안전과 신뢰가 중요 의제로 떠올랐다. 양국은 각자의 AI 전략을 공유했고, 한국 인공지능안전연구소는 프랑스 국립 디지털 과학기술 연구소(INRIA) 등과 정책 대화 채널 구축, 연구 인력 교류 확대 방안을 제안했다.
생성형 AI 경쟁이 성능 중심에서 규범과 안전의 문제로 옮겨가는 흐름을 감안하면, 이번 협력은 단순한 기술 교류를 넘어선다. 누가 더 빠른 모델을 만드느냐 못지않게, 누가 더 신뢰할 수 있는 기준과 운영 질서를 설계하느냐가 산업 주도권을 가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양자 분야는 더 직접적이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프랑스 양자컴퓨팅 기업 콴델라는 지난 3년간의 협력을 바탕으로 KAIST의 국가 양자 팹 인프라를 활용한 양자 하드웨어 제조와 소재·부품·장비 공급망 구축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콴델라는 2026년부터 한국 진출의 하나로 KAIST 안에 국제협력센터인 ‘콴델라 허브’를 설치하고, 교육·연구·산학 협력 과제를 공동 추진하기로 했다. 양자기술이 아직 초기 시장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협력은 단순한 연구 교류보다 훨씬 앞선 포석이다. 기술 축적과 시장 선점이 거의 동시에 벌어지는 영역이어서다.
반도체는 이번 회차의 제목에 비해 아직 구체적 사업 발표가 많지 않다. 그럼에도 공동성명이 반도체를 AI, 양자와 함께 핵심 혁신 분야로 명시한 건 가볍지 않다. 프랑스는 반도체 설계와 기초 연구, 일부 소재와 장비 역량에서 강점을 지니고, 한국은 제조와 양산, 공급망 운영 역량에서 앞선다. 양국의 접점은 분명하다.
문제는 협력의 필요성을 확인하는 데서 멈출지, 공동개발과 인력 양성, 장비·소재 협력, 유럽 시장 연계 같은 구체적 사업으로 이어질지에 달려 있다. 반도체가 산업인 동시에 안보 자산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협력의 폭이 넓어질수록 기술 보호와 산업정책 조율도 더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다.
이번 과학기술공동위원회는 연구 협력의 외연도 넓혔다. 2018년부터 이어진 한국 과학기술특성화대학과 프랑스 INSA 그룹 간 학생 교류 성과를 바탕으로 협력 범위를 프랑스 전체 대학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과 프랑스 기술이전가속화센터(SATT Network)는 딥테크 기술사업화 협력 현황을 점검하고, 기업 간 실증 수요 발굴과 투자 연계, 국제공동연구 활성화 등 혁신 생태계 협력을 확대하기로 했다. 연구실의 성과를 산업 현장으로 끌고 가겠다는 의지가 선명하다.
호라이즌 유럽도 이번 협력의 중요한 배경이다. 양국은 한국의 호라이즌 유럽 준회원국 가입을 계기로 연구 협력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고, 한국연구재단과 프랑스 국립연구청은 2025년에 이어 2026년 공동연구 사업을 신규 공모했으며 2027년에도 사업을 이어가기로 했다.
한-프 협력이 일회성 외교 이벤트가 아니라 중장기 연구 네트워크로 이어질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 입장에서도 유럽 연구 체계와의 접점을 넓히는 계기가 된다.
다만 냉정하게 보면, 이번 협력은 아직 ‘가능성의 설계도’에 가깝다. AI, 양자, 반도체는 모두 기술 변화 속도가 빠르다. 국가별 규제와 지원 정책, 데이터와 인재, 장비 접근성이 성패를 좌우한다.
공동위원회와 양해각서가 많다고 곧장 산업 성과가 따라오진 않는다. 공동연구의 주제를 얼마나 전략적으로 설계하느냐, 연구 성과를 누가 먼저 표준과 사업으로 연결하느냐, 한-프 협력이 미·중 중심 기술 질서 속에서 어떤 독자적 위치를 확보하느냐가 진짜 관건이다.
배경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도 이날 “이번 공동위원회가 양국의 과학기술 파트너십을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다”며 “AI와 양자 등 핵심 전략기술 분야에서 프랑스와 긴밀히 연대해 국제 기술 패권 시대의 주도권을 함께 확보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한-프 수교 140주년을 맞아 출발한 이번 협력은 이제 선언보다 실적으로 평가받게 됐다. 연구자 교류와 공동성명만으로는 미래산업 동맹이라 부르기 어렵다.
기술사업화, 공급망, 인재 양성, 표준 선점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협력의 무게가 생긴다. 한-프 미래산업 동맹의 성패는 결국 누가 먼저 성과를 시장과 산업 현장에 안착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김승한 기자 sharegridlab@gmail.com



















